모 초교 도움반의 오전 보조 쌤이 되었다. 선생님들은 나를 무척이나 반겼다. 그 말인즉슨, 이곳은 늘 손이 모자란다는 뜻이다.
나는 대체로 이 일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일을 기대하지 않고 수행하는데, 그 이유는 기대하지 않아야 그 일과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 일과 거리를 두면 일의 능률은 가장 좋은 방식으로 성취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나는 거기에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왔다. 말하자면, 큰 사명감 없이 이 일에 임하기로 작정했다는 뜻이다. 그건 나에 한하여서 나쁜 태도는 아니다. 그저 어느 정도 외부자의 입장이, 내가 맡아야 할 시간을 그 자체로 충실히 해내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기에 그렇게 하기로 했을 따름이다.
보조의 업무는 간단하다. 시간에 맞게 아이를 일반 학급에 데리고 가서 같이 수업을 듣고, 다시 도움반에 데리고 온다. 점심시간에는 점심 먹는 것을 지켜보며 도와주고 같이 밥을 먹는다.
1교시가 시작됐다. 아무도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늦어도 되고 나가도 된다. 아이가 소리를 내고 몸을 움직여도 공공연히 무시되었다. 모두가 들었지만 들은 체를 하지 않는다.
반 아이들의 이런 행동은 배려임에 틀림 없다. '다른' 아이의 '다른' 행동을 끄집어내지 않는 것. 당연히 일어나는 일은 따로 짚어낼 일이 아니니까. 반 친구들의 무반응은 그런 의미일 터다.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거기의 누구도 적대적이지 않다.
선생님이 준비한 유인물이 아이 손이 아닌 내 손에 넘어오고, 아이는 자기 할 것을 한다. 선생님은 아이를 채근하지도 타이르지도 혼내지도 않는다. 선생님의 "다같이 해보자"에 아이는 다같이가 되지 않는다. 선생님의 "누가 발표해 볼까요?"에 아이는 누가가 되지 않는다.
내 눈에 담기는 이 풍경은 꽤 묘했다. 우리는 반 아이들과 같은 시공간 속에서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낸다. 우리는 소속된 외부자였다. 마치 나처럼. 시간을 성실히 수행해야 하지만, 이 시간의 모든 것이 내 의무는 아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게는 분명한 선의인 이것이, 아이에게도 분명한 선의일까?
내가 누리는 선의는 '존재함'과 무관하다. 나는 존재한다. 다만 내가 숨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아니다. 숨겨진다. 오퍼시티 100퍼센트가 됐다가, 30퍼센트가 됐다가, 때론 50퍼센트가 된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 그렇다. 각자가 가진 투명도 조절 커서로 아이의 투명도를 조절한다.
우리는 거기에 있었지만 없었다. 존재하는데도 존재하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 그리고 그 존재함 또는 존재하지 않음을 문제 삼지 않는 것. 존재 인정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 존재의 인정이 내가 아닌 타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
다정한 소외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외하는 다정? 혹은 포용적 배제이거나 배제적인 포용?
그즈음까지 오자 내 머릿속에는 질문 하나가 떠다녔다.
왜 이 아이들은 일반 학급에서 수업을 들어야 할까?
오독되지 않길 간절히 바란다. 따로 살자, 배제하자 같은 미친 소리가 아니라… 그냥 특수학교 가면 되잖아 같은 우월의 표피만 남은 피상적 발언이 아니라... '같이 함'라는 단순한 명제를 넘어선 본질적 가치가 궁금해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아이들은 무엇을 얻는가? 왜 존재 인정 범주를 넘나들며 같은 시간 안에 있어야 하는가?
특수 학급의 아이들은 일반 아이들의 수업 진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애초에 그러한 학습 방식이 맞지 않을뿐더러, 이 아이들에게는 지식 취득보다 더 필요한 교육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교육을 도움반에서 한다.
도움반에서는 저마다 확실하게 존재하는 아이들이 자기 반에 가서 흐릿해져야 하는, '아이들을 위한' 이유가 있는 걸까?
3교시 음악 시간, 노래 하나를 배우게 됐다. 친숙한 이 노래는 사실 배울 건 따로 없었는지 음악 선생님은 반 아이들에게 정확하게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따라 하라고 했다. 그 시간 혼자 열심히 그림을 그리던 맨 끝줄의 아이는 교실 스크린 속 애니메이션과 리듬감 있는 멜로디, 반 아이들의 신나는 움직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멈칫하자, 나의 참관 동안 아이를 마크하던 전담 선생님이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움직였다.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팔을 뻗고 접으며 율동을 했다. 자리에 서서 하던 율동은 교실 앞에서 하는 율동으로 이어졌고, 아이는 여전히 함께였다.
그리고 반의 한 아이가 아주 기분 좋은 목소리로 외쳤다. "어! OO이도 한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바로 그 순간 맨 끝자리를 지키는 이 아이들이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알았다.
우리는 드문 이 순간을 늘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타의로 조절되는 아이들의 투명도가 명백한 자기 의지로 뚜렷해지는 순간을. 반 친구들이 조절할 수 없도록 아이 스스로 자기 레이어를 잠그고, 반 친구들의 투명도 조절기가 더 이상 소용 없어진 그 순간을. 그래서 반 친구들이 선명히 그 아이를 볼 수밖에 없는 순간을.
아이들의 세상은 언젠가 도움반을 벗어난다. 세상은 이곳이고, 아이들은 이곳에서 자기 몫을 다해 뚜렷해져야 한다. 내가 여기 있고, 내가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이란 걸, 그들만의 호흡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함께 호흡해야 한다. 그것이 같은 공기로 숨을 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역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