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5XXX번이랑 2XX번이랑 같은 데서 타요?”
“…음… 그건 모르겠어!”
“…근데 언니, 지금 거기 맵에서 볼 수 있는 거 아니야?”
손에 든 핸드폰 앱에 ‘길 찾기’를 여전히 띄워둔 그녀는 깔깔 웃으며, 그거까진 안 봤어!, 라고 말했다. 언니는 말했다. 어차피 정류장을 대충 알고 있는데, 거기 근처 가서 확인하면 된다고. 자기가 거기까지 가는 동안 빨리 오는 버스가 바뀔 수도 있단다. 나는 말했다. 언니, 그러기엔 정류장이 너무 코앞 아니야? 이미 우리가 언니가 말하는 그 근처인 거 아니에요? 언니는 다시 깔깔 웃었다. 그녀가 ‘대충 아는’ 그 정류장은 천천히 걸어도 2분,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면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더 빨리 오는 버스가 바뀔 수 있으니 그때 가서 다시 보겠다는 마음가짐이 내게는 무척 재밌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정보’로 대하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그것이 정보였다면, 모조리 찾아보고 알아내서 기억해 내는 것으로 취급돼야 했다. 정보란 것은 고정적이며, 유지된다. 일순간에 변할 가능성은 정보의 보편 속성이 아니다.
늘 정보 취급을 당하는 버스에게 그녀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줬고, 심지어 그 가능성 위로 떠다닌다.
“언니는 정말 우연의 가능성을 사랑하는구나?”
그녀는 이 정보들의 통제자가 될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대신 유동적이며 액체적이고, 흘러가고 있는 것에 함께 흘러가는 사람이다. 버스는 정보가 되지 않음으로써 도구화되지 않았다. 뭐랄까, 그녀라는 사람의 일부가 되어버린 느낌… 도구화되지 않아서 그녀 스스로 삶에 끼워준 느낌이다. 그래서 그 작은 거 하나가 그 자체로 의미를 생성해 버린 느낌. 말하자면, 나는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는 문장을, 버스는 나를 싣고 간다 같은 문장으로 바꿔준 느낌이다. 버스에게 주체성을 마련해준 재미있는 사람 같으니라고.
삶은 일상이다. 달리 말해, 삶은 익숙한 것들의 총체다. 돈이나 직장, 가족, 하늘과 땅처럼 쉽게 바뀔 일이 없어서 고정되어 버리는 것들로부터 시작해, 버스나 지하철, 내 손에 키보드며 노트북, 내가 있는 집과 앉아 있는 의자까지. 바꾸지 않으면 고정적인 것들이 가득하다. 대체로 그런 것들이 삶을 이룬다. 내가 너무나 순순히 사용하고, 또 직접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들 말이다.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은 채로.
아무래도 바뀔 일이 없으니 딱히 생각할 일도 없다. 그것들이 내게 가져다줄 어떠한 가능성에 관하여는. 더욱이.
언니는 정류장을 목전에 두고 마침, 바뀐 신호에 횡단보도를 종종 걸으며 마침, 대충 아는 정류장에 정차한 5XXX번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몇 분 뒤에 오는지를 외웠더라면 몇 분을 따라잡지 못할까 봐 불안해졌을지도 모른다. 몇 분만을 생각하느라 나와의 말 몇 마디에는 관심을 잃었을 수도 있고, 몇 분을 놓쳐서 기분이 나빠졌을 수도 있다.
현재만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지금’이라는 자극은 매우 강렬한 것이다. 이게 어떻게 지금 이 순간이 되었는지, 다만 우리가 감지하지 않을 뿐이다. 1초 전 선택의 결과로 나는 어떤 글자를 지우고 또 입력한다. 거기 안에 수많은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무시하고 살아간다. 멈춰있는, 실상은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시선을 멈추고 있을 따름이다.
하루하루가 재미없어. 새로운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 우연의 가능성들이 떠내려간다.